김기석 (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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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기석은 1939년 황해도 봉산군 출생으로,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이다. 전주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했으며, 서울지방검찰청 형사부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차관, 법제처 장관 등을 역임했다. 법무부 차관 재직 중에는 산업기술연수생 조정협의회 위원장을 맡아 불법 취업 외국인 근로자들의 출국을 유예했고,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위원,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97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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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법조인) | |
---|---|
인물 정보 | |
이름 | 김기석 |
원어명 | 金基錫 |
본명 | 김기석 |
로마자 표기 | Gim Gi-seok |
출생일 | 1939년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법조인 |
경력 | 제34대 법무부 차관 |
배우자 | 신현우 |
2. 생애
김기석은 검사로 재직하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호탕한 성격이었다. 말수가 적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변하지 않아 법조계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1987년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에 아파트를 마련하기까지 20년간 전셋집에서 사는 등 청빈한 검사로 알려졌다.[10]
1993년 9월 공직자 재산 신고에서 김기석은 본인 명의로 서울시 우면동 임야 1904m2(7178만원), 개포동 58평 아파트(4억 1300만원), 소나타 승용차(1014만원), 외환은행 등 2건의 예금(7155만 1천원), 골프 회원권(1000만원)을 신고했다. 배우자 명의의 예금 및 주식(9496만 6천원)과 장남 명의의 예금(2946만 7천원)을 포함하여 총 5억 8804만 9천원의 재산을 신고했다.[11]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 공개 때 부인 명의의 재산으로 1500만원의 예금만 신고했던 김기석은 그해 9월 신고에서 예금, 주식 등 9500만원을 추가로 신고했다.[12]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장으로 재직할 때 가정파괴 사범 단속에 힘썼으며,[13] 1997년 5월 15일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삼보신용금고빌딩 703호에 김기석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23]
2. 1. 검사 임용 및 초기 경력
김기석은 1939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2]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되었으며, 전주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했다.[3] 사법시험 동기로는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정경식,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한 이건개 등이 있다.[4] 송종의 대검찰청 차장검사와는 대학 및 사법시험 동기이며,[5]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장 등을 역임한 정상림과는 서울고등학교와 사법시험 동기이다.[6] 김기석은 과묵하고 빈틈없는 업무처리를 하는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7]2. 2. 주요 보직 역임
김기석은 전주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였다.[3] 1985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에서 서울지방검찰청 형사부장에 발탁되었고,[8]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직 중 1993년 5월 29일 신건 (법조인) 법무부 차관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 1991년 10월 23일 대검찰청 감찰부장 재직 중 유길선이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옮기면서 대검찰청 강력부장을 겸임했다.[14]1993년 7월 29일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16] 1993년 11월 3일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법무부 차관과 겸직하였다.[17] 국무총리 산하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했으며,[18] 법제처 장관 재직 중 1996년 5월 16일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19]
2. 3. 법무부 차관 및 법제처 장관 시절
김기석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 5월 29일에 슬로머신 대부 정덕진의 검찰 내 비호세력 파문으로 사임한 신건 (법조인) 법무부 차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 법무부 차관 재직 중 1993년 11월 24일에는 산업기술연수생 조정협의회 위원장을 맡아 국내에 불법 취업 중인 외국인 근로자 중 자진 신고한 1만 3천여 명에 대해 12월 15일까지 강제 출국시키기로 한 방침을 바꿔 출국을 유예하는 결정을 했다.[15]1993년 7월 29일, 김기석은 공무원의 등록재산에 대한 심사, 공개 등을 관할하는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16] 같은 해 11월 3일에는 법원조직, 법관인사, 재판업무 등 사법제도 개편안을 논의할 사법제도발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대법원에 의해 위원으로 위촉되어 법무부 차관과 겸직하였다.[17]
국무총리 산하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며[18] 법제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1996년 5월 16일에는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는 1일 교사를 했다.[19]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1980년 해직 언론인 118명(대표 고승우 등 3명)이 공보처 장관을 상대로 낸 행정심판 청구를 3차례에 걸쳐 심리 일정을 연기하기도 했다.[20]
OECD 대사 임명에 따른 부분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밝힌 날,[21] 김기석은 서울대학교 근대 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 준공식 참석을 마지막으로[22] 법제처 장관에서 물러났다.
3. 경력
직책 | 기간 |
---|---|
부산지방검찰청 공안부장 | |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 |
부산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
서울지방검찰청 형사3부 부장 | |
대구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
제34대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 1988년 8월 25일 ~ 1990년 3월 26일 |
대검찰청 감찰부장 | |
대검찰청 강력부장 | 1991년 10월 23일 ~ |
제34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 1993년 3월 17일 ~ 1993년 5월 30일 |
제34대 법무부 차관 | 1993년 5월 31일 ~ 1994년 9월 15일 |
사법발전위원회 위원 | 1993년 11월 3일 ~ |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24] | 1994년 9월 16일 ~ 1994년 12월 23일 |
법제처 장관 | 1994년 12월 24일 ~ 1996년 12월 19일 |
4. 평가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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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산 신고
1993년 9월 공직자 재산 신고에서 김기석은 본인 명의의 서울특별시 우면동 임야(71,780,000원),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58평 아파트(413,000,000원), 소나타 승용차(10,140,000원), 외환은행 등 2건의 예금(71,551,000원), 골프 회원권(10,000,000원)과 배우자 명의의 예금 및 주식(94,966,000원), 장남 명의의 예금(29,467,000원)을 포함하여 모두 5.88049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11]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 공개 때 부인 명의의 재산으로 1500만원의 예금만 신고했던 김기석은 그해 9월 신고에서 예금, 주식 등 9500만원을 신고했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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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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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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